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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0일 오전 06:35

동화나무 2013. 5. 10.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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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서울명소
어린이를 사랑했던 그들이 있었기에
방정환 집터, 천도교 소년회 사무소 터

[서울톡톡]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 자세 타일러 주시오. 대 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어른에게 드리는 글, 소파 방정환)

지금은 어린이라는 말이 자연스럽지만 100년 전만 해도 없었던 듯하다. 1920년 방정환(方定煥)이 어린 아동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어두웠던 역사의 시절, 학대받고 짓밟히며 자라는 어린이의 모습이 꼭 우리 민족의 처지와 비슷한 것을 보며 나라를 위한 길은 미래를 짊어질 어린이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양육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신념을 품었던 방정환. 그는 비록 32세의 젊은 나이에 이 땅을 떠났지만 그 삶을 어린이를 위해 온전히 바친 인물이다. 또한 독실한 천도교도이자 3세 교조였던 손병희(孫秉熙)의 사위였기에 천도교에서도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방정환이 살았던 집과 어린이 잡지, 어린이날을 처음으로 만드는데 헌신한 천도교 소년회 사무소는 이미 사라졌지만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그 터라도 찾아봄으로써 옛 선인들의 기억을 되살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은 서울 야주개〔당주동〕출신으로 호는 소파(小波)이다. 1913년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가정 사정으로 중퇴하고,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하였다. 이후 천도교에 입교하여 1917년 손병희의 셋째 딸 용화와 결혼하고, 유광열 등과 함께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였다. 1918년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청년구락부의 기관지 <신청년>을 펴냈다. 3․1운동 때 등사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고, <개벽>지 도쿄 특파원과 천도교 청년회 도쿄지회장을 겸임하였다.

1921년 5월부터 방정환은 김기전, 이정호 등과 함께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해 소년 운동을 본격화하였다. 특히 천도교 소년회는 창립 후 어린 사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어린이'라는 새 말을 사용하고, 소년 운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촉진시키기 위해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이후 이듬해 3월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동화구연대회, 아동미술전람회, 소년문제강연회 등을 열어 어린이를 위한 운동과 소년운동단체의 통일을 꾀했다. 방정환은 1925년 소년운동협회 지도위원, 1927년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28년 위원장에서 물러난 후엔 <어린이>와 <학생> 등의 편집에 힘썼다.

이렇게 어린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방정환은 1931년 7월 과로로 병을 얻어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삶을 마쳤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별세 전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은 현재 종로구 북촌로 5길 78(소격동 84) 북촌칼국수 주변으로 지금은 도로로 편입되어 사라지고 없다. 차들이 달리는 그곳에 서있자니,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라도 세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찾아든다.



어린이날 첫 행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잡지인 <어린이>가 창간된 1923년 조선소년군(현재 보이스카우트의 전신), 불교 소년회 등과 연합하여 조선소년운동연합회 이름으로 5월 1일 거행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 1927년부터 '어린이날' 행사는 5월 첫 일요일로 날짜를 바꾸어 치러졌으며,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매년 5월 5일을 정하여 행사를 진행됐다. (1961년 확정되었고, 1975년부터 공휴일로 제정되었다) 이후 천도교 소년회는 사회주의 계열이 조선소년연합회를 총연맹으로 개편해 주도권을 장악하자 1928년 4월 중앙기관으로 천도교 소년연합회를 조직하고, 1930년 4월 천도교 소년연합회 총본부로 개편하여 민족주의 계열의 소년 운동으로 이끌어 나갔다.

천도교 소년회 사무소 터는 종로구 삼일대로 457(경운동 88) 천도교 수운회관자리이다. 이곳은 1920년 6월 25일 정신의 개벽과 사회의 개조를 부르짖고 항일사상을 고취한 종합 월간지 <개벽>을 펴낸 신문화 운동의 요람이기도 하다. 1920년대 중앙대교당과 중앙종리원, 수운기념관 등 세 개의 커다란 양옥건물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중앙종리원 건물(현 수운회관 자리)에 천도교 소년회가 입주해 있었다.

천도교 수운회관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5번 출구에서 낙원상가 방향으로 도보 3분 거리이며, 지하철 1호선 종각역 3번 출구 YMCA앞에서 종로 01, 02번 마을버스를 타고 수운회관 앞에서 하차하면 바로 보인다. 방정환 집터는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에서 종로 11번 마을버스를 타고 정독도서관에서 하차하여 100m거리에 있다.